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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0. 10世 〉21. <부정공>여절교위삼탄공휘대춘행상(勵節校尉三灘公諱大春行狀)
1. 문헌 목록 〉10. 10世 〉23. <부정공>여절교위충무위부사과삼탄공휘대춘묘표(勵節校尉忠武衛副司果三灘公諱大春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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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삼탄공휘대춘묘지명(三灘公諱大春墓誌銘)
三灘公諱大春墓誌銘 李膺獨與郭泰同舟望之者以爲神仙至今讀之颯爽照人河西先生固百世宗師玉峯白公亦一世豪士賢人所過逢迎必多而所與題名獨公爲同舟之郭泰則當日觀瞻諸人榮耀於公者何如而後人執此可以槩公重峯題公漾碧亭曰廣川山水勝江南江南爲天下名山水非廣川可勝重峯又非妄安一字則勝江南在公不在山水也然則公言行雖不傳而當時敬重於公爲汝南黃叔度優公生仁 明 間見乙巳禍機筮遯漾碧結亭終老林慮山中夏馥爲黨錮完人生卒官職並與言行而無傳所傳只有士當利器俟時六言此六言者可見公非躁進亦見非長往往而不返時也非公爾躬行孝弟喪祭以禮刑妻敎子敬義以立胷懷坦蕩言色無疾遽和以處人好古勵行後孫鍾悳記家傳爲狀所收僅若而而小者可信其大者彼石面不磨與河西玉峯齊名區區綴拾何足有亡於公也公諱大春春之三灘字若號趙氏貫玉川麗侍中諱璋忠獻公諱元吉爲顯祖忠獻與圃牧並時而節行亦並稱生副正諱瑜麗季喪紀壞廢獨致哀如禮 我朝徵不起南遯順天之住巖即公五世而子孫世居高祖 贈吏議諱斯文曾祖察訪諱智崙祖直長諱穩考忠順衛諱淑璟河西先生表其墓妣全州崔氏三戒女所生諱淑琦從仕郎著行誼公娶延安李氏參奉 贈參判繼長女有婦德後玄風郭氏尹末女俱無嗣以兄校尉大楠子懋后焉官參奉孫曾多不盡述墓順天弓角山金洞坐未原學洙鍾協基永不以余無文俾誌其幽而其族人昌赫以舊友申其請銘曰漾碧爲亭遯世主人河西玉峰我有嘉賓題名有石百世淸芬人去亭毀石與名存弓角之山負未而原堂斧四尺實維其阡 幸州 奇宇萬 撰 삼탄공휘대춘묘지명(三灘公諱大春墓誌銘) 이응(李膺)이 곽태(郭泰)와 함께 배를 타고 가니 멀리서 바라본 사람들이 신선(神仙)으로 여겼다 하는데 지금도 그 글을 읽으면 마음속까지 시원하다. 하서 선생은 본래 백세의 스승이며 옥봉 백공 역시 당시의 호걸스런 선비였다. 현인(賢人)이 지나는 곳에는 맞아주는 사람이 반드시 많은 법인데도 유독 공에게만 시를 써서 주었으니 이는 공을 곽태로 여겨 한 배에 탄 것이다. 그랬으니 당시 바라보던 여러 사람들이 공을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겼겠으며 후세 사람들은 이걸로 공의 대략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선생이 양벽정에 쓴 시 가운데 광천의 산수 강남보다 아름답네(廣川山水勝江南)이란 귀절이 있는데 광천이 천하의 명승지가 된 것은 광천의 경치가 아름다와 그런 것이 아니요, 또 중봉이 망령되이 강남보다 났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는 조공이 있기 때문이지 경치가 아름다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공의 언행은 비록 전하지 않더라도 당시 사람들이 공을 추앙한 것이 여남(汝南)의 황숙도(黃叔度)보다 더 했던 것이다. 공은 인종·명종때 살면서 을사 사화가 일어날 기미를 보고는 양벽 물가에 은퇴하여 정자를 지어 일생을 보냈다. 그래서 산중 모정의 큰 향기로 당고(黨錮)의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생졸연대와 관직 및 언행은 전한 것이 없고 다만 선비는 마땅히 학문을 닦아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士當利器俟時) 하는 여섯 자만이 전하여 이 여섯 자로 보건대 공은 급히 진출하려 하지 않았고 아주 오래 은퇴하려 한 것이 아닌데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음은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이지 공의 본심은 아니었다. 공은 몸소 효제를 실천하고 상제(喪祭)에 예를 다하고 아내의 모범이 되고 자제를 가르쳤으며, 의(義)를 존중하여 포부가 컸다. 말을 빨리하지 않고 안색을 바꾸지 않으면서 온화한 얼굴로 사람을 대하였다. 옛 사람의 도를 좋아하여 힘써 행하여서 후손 종덕(鍾德)이 쓴 집안에 내려온 가장(家狀)은 그 가운데서도 작은 것들에 불과할 뿐이다. 크고 믿을 만한 것은 저 바위에 새겨져 마멸되지 않은 하서·옥봉과 이름을 나란히 한 것이다. 그러니 구차하게 주워모아 쓴 행장이 공에게 어찌 합당하랴. 공의 휘는 대춘(大春), 자는 춘지(春之) 호는 삼탄(二灘)이다. 조씨의 본관은 淳昌인데 고려 시중 휘 장과, 충헌공 휘 원길을 현조(顯祖)로 한다. 충헌공은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선생과 같은 때 사람인데 절행(節行) 역시 함께 일컬어진다. 충헌공이 부정(副正) 휘 유를 낳았는데 고려말 상례가 문란할 때에도 홀로 상을 예법대로 치르었고 조선에서 벼슬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남쪽 순천 주암에 은거하였는데 이 분이 바로 공의 五대조로 자손이 이때부터 순천에서 대대로 살았다. 고조는 이조참의에 추증된 휘 사문(斯文)이요, 증조(曾祖)는 찰방 휘 지륜(智崙), 조는 직장(直長) 온(穩), 고는 충순위 휘 숙경(淑璟)인데 이분의 묘표(墓表)는 하서 선생이 썼다. 어머니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삼계(三戒)의 따님이며, 생부(生父)는 휘 숙기(淑琦)로 종사랑을 지냈는데 행의로 유명하였다. 공은 연안이씨(延安李氏) 참봉이며, 참판에 추증된 계장(繼長)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부인은 부덕이 있었다. 후에 현풍곽씨(玄風郭氏) 윤말(尹末)의 딸을 재취로 맞았으나 모두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그래서 형인 교위(校尉) 대남(大楠)의 아들 무(懋)를 양자로 삼았다. 무는 벼슬이 참봉인데 이하 손자와 증손은 많아서 다 기록하지 못한다. 묘는 순천 궁각산 금동 미좌(未坐)에 있다. 학수(學洙)·종협(鍾協)·기영(基永)이 내가 글을 하지 못하는 것을 탓하지 않고 무덤의 묘지를 쓰게 하였는데 그들의 족인 창혁(昌赫)은 나의 오랜 친구로서 나에게 청해 왔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양벽 물가의 정자는 漾碧爲亭 은거한 분의 정자 遯世主人 하서와 옥봉은 河西玉峯 나의 훌륭한 손님 我有嘉賓 바위에 이름을 새겨 題名有石 백세토록 남겼는데 百世清芬 사람은 가고 정자 허물어 지고 人去亭毀 바위와 이름만 남았네. 石與名存 궁각산 기슭 弓角之山 미좌 언덕에 세워진 負未而原 四척의 비는 堂斧四尺 실로 공의 무덤일세. 實維其阡 幸州 奇宇萬 지음 註:※이응(李膺)—후한(後漢)때 학자 나라가 어지러워져 혼자 지조를 지키고 제자들을 가리켰으며, 그의 문하에서 많은 명환(名宦)이 배출되어 등용문(登龍門)이라 불렀다. ※곽태(郭泰)—후한(後漢)때 학자로 경서에 능하여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이응(李膺)과 친하게 지냈다. ※조중봉(趙重峰:趙憲 一五四四∼一五九二)—본관은 백천 호는 중봉(重峰) 이이(李珥) 성혼(成渾)의 문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二十五년 七백 의병과 함께 금산전투에 참가했다가 모두 전사했음. ※黨錮禍—後漢末에 陳蕃과 李膺등이 宦官의 弄權을 除去코저 함을 환관등이 미리 알고 黨人으로 볼아 終身禁錮한 것 ※기우만(奇宇萬)—의병장. 호는 송사(松沙) 본관은 행주(幸州), 장성(長城) 출신 一八八一년 참봉(參奉)으로 만인소(萬人疏)에 가담하였으며, 一八九五년 민비가 시해되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웠다. 그후 체포되어 광주 등 여러 곳에서 복역(服役)한 후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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